라멘 완벽 가이드: 일본 국민 음식의 모든 것
라멘, 단순한 면 요리가 아니다
일본 여행을 다녀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라멘집 앞에서 줄을 서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그릇, 탱글탱글한 면발, 그리고 진한 육수 한 모금. 라멘은 단순히 배를 채우는 음식이 아니라 일본의 식문화 그 자체를 담고 있는 요리다.
솔직히 말하면, 처음 일본에서 라멘을 먹었을 때는 그저 “맛있는 국수”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다양한 라멘을 먹어보니 이게 정말 깊은 세계라는 걸 알게 됐다. 후쿠오카에서 먹은 돈코츠 라멘과 삿포로에서 먹은 미소 라멘은 같은 “라멘”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완전히 다른 음식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오늘은 라멘에 대해 제대로 파헤쳐 보려고 한다. 라멘을 좋아하는 분들, 일본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분들, 혹은 그냥 맛있는 음식에 관심이 있는 분들 모두에게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라멘의 역사: 중국에서 건너와 일본에서 꽃피다
라멘의 기원을 이야기하려면 먼저 중국을 언급해야 한다. 라멘의 원형은 중국의 납면(拉麵)으로, 밀가루 반죽을 손으로 늘려서 만드는 면 요리다. 이 요리가 일본에 전해진 것은 메이지 시대 말기부터 다이쇼 시대 초기, 그러니까 1900년대 초반쯤이다.
처음에는 주로 요코하마나 고베 같은 항구 도시의 차이나타운에서 중국인들이 운영하는 식당에서만 먹을 수 있었다. 당시에는 “시나소바(支那そば)” 또는 “주카소바(中華そば)“라고 불렸는데, 둘 다 “중국식 면”이라는 뜻이다.
라멘이 본격적으로 일본 전역에 퍼지게 된 건 제2차 세계대전 이후다. 전쟁이 끝나고 식량난이 심해지면서 미국에서 들여온 밀가루가 대량으로 풀렸고, 이를 이용한 면 요리가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특히 야타이(屋台)라고 부르는 노점상에서 라멘을 파는 경우가 많았는데, 저렴한 가격에 든든하게 배를 채울 수 있어서 서민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1958년에는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닛신 식품의 안도 모모후쿠가 세계 최초의 인스턴트 라면인 “치킨 라면”을 개발한 것이다. 이후 1971년에는 컵라면까지 등장하면서 라멘은 명실상부한 국민 음식으로 자리 잡게 됐다.
라멘의 네 가지 기본 스타일
라멘은 육수의 종류에 따라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물론 요즘은 이런 구분이 무의미할 정도로 다양한 퓨전 라멘이 등장하고 있지만, 기본을 알아두면 메뉴판 앞에서 당황하는 일은 줄어들 것이다.
1. 돈코츠(豚骨) 라멘
돈코츠는 “돼지 뼈”라는 뜻이다. 돼지 뼈를 오랜 시간 푹 고아서 우려낸 육수를 사용하는데, 뽀얀 유백색의 걸쭉한 국물이 특징이다. 콜라겐이 풍부해서 입술이 찐득해질 정도로 진한 맛이 난다.
돈코츠 라멘의 본고장은 규슈 지방, 그중에서도 후쿠오카가 가장 유명하다. 하카타 라멘이라고도 불리는데, 면이 굉장히 가늘고 딱딱한 게 특징이다. 면의 익힘 정도를 “카타메(硬め, 딱딱하게)”, “후츠우(普通, 보통)”, “야와라카메(柔らかめ, 부드럽게)“로 선택할 수 있어서, 처음 가면 좀 당황스러울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바리카타(バリカタ)“로 주문하는 걸 좋아한다. 아주 딱딱하게 삶은 면인데, 씹는 맛이 살아있어서 중독성이 있다. 하카타 라멘의 또 다른 특징은 “카에다마(替え玉)“라는 시스템이다. 면을 추가 주문할 수 있는 건데, 국물이 남으면 저렴한 가격에 면만 추가해서 먹을 수 있다.
2. 쇼유(醤油) 라멘
쇼유는 “간장”이라는 뜻이다. 닭이나 돼지, 때로는 생선으로 우려낸 육수에 간장으로 간을 맞춘 라멘이다. 맑은 갈색 국물이 특징이고, 네 가지 중에서 가장 담백한 맛이 난다.
쇼유 라멘은 도쿄를 중심으로 한 간토 지방에서 발전했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라멘 스타일이기도 해서, “도쿄 라멘” 또는 “클래식 라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토핑으로는 차슈(돼지고기 구이), 메마(죽순), 파, 김, 반숙 달걀 등이 올라가는 게 일반적이다.
쇼유 라멘은 처음 라멘을 접하는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다. 자극적이지 않으면서도 라멘 특유의 감칠맛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심심하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으니, 진한 맛을 좋아한다면 다른 스타일을 시도해 보는 것도 좋겠다.
3. 미소(味噌) 라멘
미소는 일본 된장을 뜻한다. 돼지나 닭 육수에 된장을 풀어 만드는데, 구수하고 깊은 맛이 특징이다. 홋카이도의 삿포로가 미소 라멘의 본고장으로, 추운 지방답게 열량이 높고 든든한 맛이 난다.
미소 라멘은 1955년 삿포로의 “아지노 산페이”라는 식당에서 처음 만들어졌다고 알려져 있다. 손님이 돼지고기 미소 볶음에 라멘 국물을 부어달라고 요청한 것이 계기가 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미소 라멘의 면은 보통 중간 굵기의 곱슬곱슬한 면을 사용한다. 된장 국물이 면에 잘 달라붙도록 하기 위해서다. 토핑으로는 콩나물, 옥수수, 버터 등이 들어가는 경우가 많은데, 특히 버터 콘 미소 라멘은 삿포로의 명물이다.
겨울에 삿포로를 여행한다면 미소 라멘은 필수다. 영하 10도가 넘는 추위 속에서 먹는 뜨끈한 미소 라멘 한 그릇은 정말 잊을 수 없는 경험이 된다.
4. 시오(塩) 라멘
시오는 “소금”이라는 뜻이다. 네 가지 중에서 가장 맑고 깔끔한 맛이 나는 라멘이다. 닭이나 돼지, 해산물로 우려낸 육수에 소금으로만 간을 해서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리는 게 특징이다.
시오 라멘의 원조는 홋카이도 하코다테로 알려져 있다. 항구 도시답게 해산물 육수를 베이스로 하는 경우가 많고, 투명한 국물이 특징이다. 다른 라멘에 비해 칼로리가 낮고 담백해서 기름진 음식을 부담스러워하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다.
솔직히 말하면 시오 라멘은 처음에 좀 밋밋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좋은 시오 라멘을 만나면 생각이 달라진다. 육수의 깊은 맛과 소금의 미네랄이 어우러져서 “이게 라멘이구나” 하는 깨달음을 주는 맛이다.
지역별 라멘 탐방
일본은 지역마다 특색 있는 라멘이 발달해 있다. 라멘 때문에 일본 여행 코스를 짜는 사람도 있을 정도니, 주요 지역별 라멘의 특징을 알아두면 여행이 더 풍성해질 것이다.
하카타 라멘 (후쿠오카)
앞서 언급했듯이 돈코츠 라멘의 본고장이다. 뽀얀 돼지뼈 육수에 가는 직면, 그리고 카에다마 시스템이 특징이다. 유명한 체인으로는 “이치란(一蘭)“이 있는데, 칸막이 좌석에서 혼자 조용히 먹는 시스템으로 유명하다. 처음에는 좀 당황스럽지만, 오로지 라멘에만 집중할 수 있어서 나름 매력이 있다.
삿포로 라멘 (홋카이도)
미소 라멘의 대표 주자다. 추운 지방답게 기름기가 있고 든든한 맛이 특징이다. 버터와 콘을 토핑으로 얹은 “버터 콘 라멘”이 유명하고, 진한 미소 국물에 중화면이 잘 어울린다.
도쿄 라멘
쇼유 라멘을 기본으로 하지만, 워낙 다양한 스타일이 공존하는 곳이다. 최근에는 “츠케멘(つけ麺)“이 크게 유행하고 있다. 면과 국물을 따로 내어서 면을 국물에 찍어 먹는 방식인데, 진한 국물과 굵은 면의 조합이 일품이다.
기타카타 라멘 (후쿠시마)
일본 3대 라멘 중 하나로 꼽히는 곳이다. 인구 대비 라멘집 수가 일본에서 가장 많다고 한다. 돼지뼈와 니보시(말린 정어리)를 섞은 육수에 넓적한 곱슬면을 사용하는 게 특징이다. 아침부터 라멘을 먹는 “아사라(朝ラー)” 문화가 있을 정도로 라멘을 사랑하는 지역이다.
와카야마 라멘
돈코츠와 쇼유를 섞은 “돈코츠 쇼유” 스타일이 특징이다. 진한데 짜지 않은 절묘한 균형의 맛이 난다. 현지에서는 라멘과 함께 “하야즈시(早寿司)“라는 고등어 초밥을 곁들여 먹는 문화가 있다.
라멘 제대로 먹는 법
라멘을 먹는 데 정해진 규칙이 있는 건 아니지만, 알아두면 더 맛있게 즐길 수 있는 팁들이 있다.
면부터 먼저
라멘이 나오면 일단 면부터 먹기 시작하는 게 좋다. 면은 시간이 지나면 불어서 식감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특히 하카타 라멘처럼 가는 면은 금방 퍼지니까 서둘러 먹어야 한다.
소리 내서 먹어도 된다
한국에서는 면을 소리 내서 먹으면 예의에 어긋난다고 배웠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오히려 소리를 내면서 면을 흡입하는 게 자연스럽다. 공기와 함께 면을 빨아들이면 향이 더 잘 느껴진다는 이유도 있고, 뜨거운 면을 식히는 효과도 있다.
토핑 활용하기
테이블 위에 놓인 조미료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보자. 마늘, 생강, 고춧가루, 참깨, 후추 등 다양한 조미료가 있는데, 먹다가 중간에 넣으면 맛의 변화를 즐길 수 있다. 특히 돈코츠 라멘에 홍쇼가(紅生姜, 붉은 생강 절임)는 기름진 맛을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국물은 마셔도 되고 안 마셔도 된다
라멘 국물을 다 마시는 게 예의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꼭 그렇지는 않다. 라멘 국물은 염분이 높기 때문에 건강을 생각한다면 남겨도 괜찮다. 다만 맛있어서 다 마시고 싶다면 그것도 자유다.
라멘과 함께 먹으면 좋은 사이드 메뉴
라멘집에 가면 라멘만 먹고 오기 아쉬울 때가 있다. 라멘과 잘 어울리는 사이드 메뉴 몇 가지를 소개한다.
교자(餃子)
라멘과 교자는 환상의 조합이다. 바삭한 군만두를 라멘 국물에 살짝 적셔 먹으면 그 맛이 정말 일품이다. 일본 교자는 한국 만두에 비해 마늘이 많이 들어가서 풍미가 강하다.
차항(チャーハン)
볶음밥이다. 라멘 국물과 볶음밥의 조합은 든든함의 극치다. 배가 많이 고플 때 추천한다.
반숙 달걀
“아지타마고(味玉)” 또는 “니타마고(煮卵)“라고 부르는 반숙 양념 달걀이다. 간장 베이스 양념에 재운 반숙 달걀인데, 라멘에 기본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추가 토핑으로 주문할 수도 있다. 노른자가 흘러나오는 반숙 상태가 가장 맛있다.
집에서 라멘 즐기기
일본에 자주 갈 수 없다면 집에서라도 라멘을 즐겨보자. 요즘은 좋은 재료들이 많이 나와서 집에서도 꽤 괜찮은 라멘을 만들 수 있다.
생면 활용하기
인스턴트 라면도 맛있지만, 생면을 사용하면 식감이 확실히 다르다. 한인 마트나 일본 식료품점에서 냉장 생면을 구할 수 있다. 삶는 시간을 잘 지키는 게 중요하다.
육수는 사서 쓰자
집에서 돈코츠 육수를 처음부터 끓이려면 최소 8시간 이상이 걸린다. 시간과 노력을 생각하면 시판 육수를 사용하는 게 현실적이다. 요즘은 냉동 농축 육수도 많이 나오는데, 품질이 꽤 좋다.
토핑은 정성껏
차슈를 직접 만들기 어렵다면 삼겹살을 구워서 올려도 된다. 파, 김, 달걀만 제대로 준비해도 라멘 느낌이 난다. 반숙 달걀은 물이 끓으면 달걀을 넣고 6분 30초간 삶은 뒤 바로 얼음물에 담그면 된다.
라멘의 미래
라멘은 계속해서 진화하고 있다. 전통적인 네 가지 스타일을 넘어서 온갖 창의적인 라멘들이 등장하고 있다. 트러플 오일을 넣은 고급 라멘, 비건을 위한 채식 라멘, 저탄수화물 면을 사용한 다이어트 라멘 등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한편으로는 전통을 지키는 장인들도 여전히 건재하다. 수십 년간 같은 방식으로 육수를 우려내고, 같은 맛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라멘 장인들. 그들 덕분에 우리는 여전히 “진짜” 라멘을 맛볼 수 있다.
라멘은 단순한 면 요리가 아니다. 그 안에는 일본의 역사, 지역의 특색, 장인의 정신이 담겨 있다. 다음에 라멘 한 그릇을 앞에 두게 된다면, 그 뒤에 숨은 이야기들을 떠올려 보는 것도 좋겠다. 분명 더 맛있게 느껴질 것이다.
마치며
라멘에 대해 이렇게 길게 써놓고 보니, 갑자기 라멘이 먹고 싶어진다. 글을 쓰는 내내 군침이 돌았다고 고백해야겠다. 여러분도 이 글을 읽고 라멘이 땡긴다면, 오늘 저녁은 라멘 어떨까?
일본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꼭 현지에서 다양한 라멘을 맛보길 바란다. 같은 라멘이라도 지역마다, 가게마다 맛이 다르니까 여러 군데를 돌아다니며 비교해 보는 재미가 있다. 그리고 자신만의 “최애 라멘”을 찾아보는 것도 여행의 묘미가 될 것이다.
라멘, 알면 알수록 빠져드는 매력이 있는 음식이다.